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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에서 찾은 아이

작성자
이승준
작성일
2020-05-15 01:47
조회
100
우선 518은 저에게는 (80년대도 아닌) 90년대 대학을 다닌 어느 운동권 학생의 투쟁경험으로 기억됩니다. 1995년 518 학살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투쟁 말이죠.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한국은행 인근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처음 들이마신 최루탄의 공포, 충무로 사거리 명동 사이 도로에서 있었던 전경과의 대치, 서울로 상경한 광주지역 오월돌격대들의 쇠파이프 공격. 당시 1학년 학생이었던 제겐 2인 1조로 일사분란하게 경찰 방어막을 뚫던 사수대들의 잘 조직된 전투적 시위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게 그들은 영화 속 히어로물의 주인공들처럼 보였고, 또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은 기억과 경험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무기의 사용법, 잘 훈련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용맹함, 특정 시기에 유효한 시위전술 등등을 거리에서 몸으로 익힐 수 있었던 것이죠.

좀 더 거슬러 올라가 518은 80년대 내내 들었던 ‘한이 서린’ 말로 기억됩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광주의 친척들 손에 맡겨졌던 제게 고모들은 늘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승준아 너는 유명한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꼭 대학원까지 마치고 고모가 한참 지나서 나중에 해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어린 저에게 당시에 이 말은 그냥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잔소리쯤으로 여겨졌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건 할머니와 고모들의 ‘한’을 말해줍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겪었던 이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가. 이 원통함, 억울함을 왜 모두가 쉬쉬하는가. 정부도 언론도 국회도 왜 모두 침묵하는가. 우리 광주 사람들이 이렇게 학살당하고 죽었는데 이걸 왜 아무도 모르는지, 왜 우리 편에 서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원통해 못살겠다. 네가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이걸 밝히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우리가 당했던 이 진실을 알리는 일이다’라고 말이죠.

1979년에 처음 광주에 내려 보내진 저는 학교에 입학한 1983년까지 학동 외가집과 백운동의 고모댁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백운동 동사무소와 학동 광주은행을 오가면서 말이죠. 택시를 태워 보내진 저는 저 장소 앞에 기다리던 외할머니와 고모를 만났었죠. 지금은 돌아가신 큰고모부가 저를 ‘똘똘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학동 시장이나 백운동 동네 분들도 저를 그렇게 불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정작 518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은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저의 기억에는 없는데, 전두환, 노태우가 법정에 서고 정권이 바뀐 2000년대 어느 날 할머니와 고모들은 처음으로 518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총소리가 들리는 밤 무서워서 고모들과 할머니와 같이 다락방 이불 속에 숨어서 벌벌 떨며 밤을 보냈던 일, 그 위험한 상황에서 외갓집과 친가쪽 친척들이 서로 자신들이 나를 돌보겠다고 싸웠던 일, 김밥을 말아서 시위자들에게 전해주려 전남도청에 갔었던 큰고모의 이야기, 저와 친척들의 안부를 물으려고 성남에서 내려왔지만 통행이 제한되어 송정리 외곽 인적이 드문 길을 통해 걸어 들어왔다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다시 성남으로 올라간 아버지의 이야기 등.

그 중에서도 제게 일어난 가장 큰 일은 아마도 518의 어느 날 남광주역인가 남광주 터미널인가(정확한 장소와 날짜를 특정하진 못하셨는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고모의 말로는 광주사는 사람들이 모두 여기로 모인 것 같았다고 합니다—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는 것만 생각난다고 합니다)에서 인파에 밀려 저를 잃어버린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 데리고 나갔다가 어린 조카의 손을 놓쳤으니 얼마나 놀라고 자책을 하셨을까요? 큰고모와 큰고모부가 저를 1시간 넘게 사람들 속에서 찾아 헤매다 광장 바닥에 주저앉아 울 때, 한쪽에서 200-300여명 되는 사람이 둥그렇게 모여 박수를 치고 웃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놀랍게도 누군가 혼자 있는 저를 보고, 보호자를 찾아주려 사람 가슴 높이의 벽(환풍구?) 위에 올려 두었는데, 제가 거기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거에요.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인양 아이가 귀엽다고 쳐다보면서 박수를 치고 재밌어했더라는 거죠. ‘아이구 똘똘아 너 거기 있었냐?’고 고모부가 소리치면서 달려와 안으니까 사람들이 다행이라고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문흥동에 살고 계신 고모는 518 이후 한 명의 광주시민으로서, 민주투사로서 늘 518을 잊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였습니다. 80년 이래로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518 묘역에 묻히는 날이면 찾아가 마지막을 함께하면서 고인을 배웅하는 일을 광주사람인 자신의 의무라고 여길 정도니까요. 그런 고모가 저에게 기대한 바도 바로 518을 기록하고 알리고 권력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고모의 요구와 기대에 완전히 부합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수기를 보내는 이 기획 이름이 ‘어셈블리ASSEMBLY 518’라는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겁니다. 마침 전남대 윤수종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최근에 번역한 책 이름도 󰡔어셈블리󰡕(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저, 이승준․정유진 번역, 알렙, 2020)이니까요.

* 1981년 10월에 대입 예비고사를 앞두고 행방불명된 광주고 학생이었던 막둥이 외삼촌의 이름은 ‘김재천’인데, 우리 가족은 처음에는 이 일을 단순가출로 파악했다 어리석게도 아주 최근에서야 혹시 이 일이 518 이후에 자행된 국가폭력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닐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동 광주은행 근처에 살았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모두 돌아가셨지만, 혹시라도 모를 실낱같은 단서라도 잡고자 합니다. 이 일에 대해 아시는 분이 있다면 꼭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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